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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가 꿈에서 만난 사도세자, 실록에 기록된 왕의 초자연적 체험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연려실기술』

    부제

    정조실록에는 정조가 꿈에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여러 차례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수원 화성 축조를 결심한 시기에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 "그곳이 좋다"고 말했다는 내용이 있다. 정조는 이를 공식적으로 기록에 남기게 했고, 신하들에게도 꿈 이야기를 전했다. 왕의 꿈이 국가 정책의 근거가 된 특이한 사례다. 효심의 표현인지, 정치적 명분 만들기인지, 혹은 실제 초자연적 체험인지. 해석은 듣는 이의 몫이나, 아버지를 향한 정조의 마음만은 진실이었다.

    태그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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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280자, 질문형)

    여러분, 한 나라의 임금이 한밤중 꿈자리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면 어떠시겠습니까.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그리고 그 꿈이 한 도시를 일으켜 세우는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고 한다면요. 더 놀라운 것은 그 이야기가 항간의 풍문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 같은 정사 기록에 또렷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지요. 정조 대왕과 사도세자, 부자의 한이 만들어낸 그 기이한 꿈자리의 비밀을 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자, 사랑방에 둘러앉으셔서 이 늙은이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여 주십시오.

    ※ 1: 사도세자의 비극과 어린 정조의 한

    자, 오늘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는 말이지요, 조선 왕실 기록 한가운데 또렷이 적혀 있는, 한 임금의 아주 기이하고도 애절한 꿈 이야기랍니다. 이게 무슨 항간에 떠도는 풍문이 아니에요. 다른 데도 아닌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연려실기술 같은 정사 기록에 떡하니 남아 있는 이야기지요.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정조 대왕이십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그분,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다는 그 위대한 임금이지요. 그런데 그토록 영명하셨던 임금께서, 한밤중 꿈자리에서 자꾸만 한 사람을 만나셨다는 게야. 그게 누구인고 하니, 바로 당신의 아버지, 그 비극의 사도세자였답니다.

    여러분, 이쯤에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사도세자 이야기를 먼저 한번 풀어드려야 정조의 그 깊은 한을 이해하실 테니 말이지요.

    때는 영조 임금 시절, 임오년(壬午年) 윤오월이었답니다. 윤오월이라는 게 우리가 흔히 알기로 사월 다음에 한 달이 더 끼는 그 윤달이지요. 그 무더운 윤오월 어느 날, 영조 임금께서 당신의 아드님인 사도세자를 뒤주, 그러니까 쌀 담아두는 그 큰 나무궤짝 속에 가두라 명하셨답니다. 그것도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 말이지요.

    세자가 그 뒤주 안에서 여드레를 꼬박 굶고 갈증에 시달리다 마침내 숨을 거두셨답니다. 스물여덟 한창나이에... 아버지가 아들을 굶겨 죽인, 우리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그 무서운 일이 그렇게 벌어졌던 게야.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들 부르지요.

    그때 사도세자의 어린 아드님이 한 분 계셨답니다. 나이가 열한 살. 그 어린 세손이 바로 훗날의 정조 대왕이셨지요. 보세요, 열한 살이면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생이 아니겠습니까. 그 어린 나이에 자기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광경을 보았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겠어요.

    기록을 보면 어린 세손이 할아버지 영조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빌었답니다.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 주소서. 아비를 살려 주소서..."

    그 어린 손주의 눈물에도 영조 임금은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으셨답니다. 그게 얼마나 큰 상처였겠습니까. 정조께서 훗날 즉위하시던 그날, 신하들 앞에 서서 처음 하신 그 유명한 한 마디가 있어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한 마디 속에, 평생을 두고 가슴에 품어온 한이 다 담겨 있는 거지요.

    그러나 즉위 후에도 정조께서는 함부로 아버지를 추숭하실 수가 없었답니다. 왜냐고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노론 세력이 여전히 조정의 큰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었거든요. 자칫 잘못 움직였다간 정조 본인의 자리도 위태로워질 판이었지요.

    그래서 정조께서는 한참을 기다리셨답니다. 마음속 깊이 응어리진 그 그리움과 한을 누르고 또 누르면서, 십삼 년을 꼬박 참으셨던 게야. 그러던 어느 날부터, 임금의 꿈자리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더라는 거예요.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한 나라의 임금이, 그것도 그 영명하시던 정조 대왕께서 밤마다 아버지 꿈을 꾸셨다고 하면 그게 어떤 무게로 다가오겠는지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그리고 그 꿈이 마침내 한 도시를 일으켜 세우는 결정으로 이어졌다고 한다면 말이지요. 자, 그러면 그 기막힌 사연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 봅시다.

    ※ 2: 사도세자의 "그곳이 좋다"

    정조 임금께서 즉위하신 뒤로 십삼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고 하니, 임금께서 묵묵히 힘을 기르고 또 기르셨던 게야.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만들어 군사력을 다지시고, 규장각을 세워 인재를 키우시고, 노론 일변도이던 조정에 남인이며 소론이며 두루 등용해 균형을 잡으셨답니다.

    그러는 틈틈이 임금께서는 양주 배봉산에 있는 영우원(永祐園), 그러니까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자주 찾으셨답니다. 거기가 본디 무슨 자리였느냐 하면, 보세요, 묘소라기엔 자리가 영 좋지 못한 곳이었어요. 산세가 박약하고 풀이 잘 자라지 않으며, 봉분 한쪽이 자꾸 패이더라는 게야. 임금께서 가실 때마다 그 광경을 보고 가슴이 무너지셨다지요.

    '아버님... 어찌 이런 자리에 누워 계시오리이까. 이 못난 아들을 용서하소서.'

    그 한이 차곡차곡 쌓여가던 무렵이었답니다. 정조 십삼 년, 그러니까 기유년(己酉年) 어느 봄밤이었지요. 임금께서 창덕궁 연침에 드시어 잠을 청하시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날 밤은 평소와 다르게 잠이 묘하게 깊이 빠져드시더라는 게야.

    그 깊은 잠 속에서, 임금께서 한 분을 만나셨답니다. 누구이겠습니까. 다름 아닌 사도세자, 임금의 아버지였지요. 살아계실 적의 그 모습 그대로, 다만 얼굴에 깊고 그윽한 평안함이 깃들어 있더라는 거예요.

    "산아."

    세자께서 어린 시절 부르시던 그 이름으로 임금을 부르셨답니다. 정조 임금의 휘(諱)가 산(祘) 자였으니까요. 정조께서 그 부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으셨답니다.

    "아바마마..."

    목이 메어 더 말씀을 잇지 못하시는데, 사도세자께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곳을 가리키시더라는 거예요. 그곳이 어디인고 하니, 멀리 남쪽, 푸른 산자락이 굽이굽이 이어진 어느 자리였답니다. 산 모양이 마치 꽃봉오리 같은 형국이었지요.

    "그곳이... 좋다."

    세자께서 단 한 마디를 나직이 이르시더랍니다.

    "그곳이 좋다, 산아."

    임금께서 무어라 더 여쭈려 하시는데 세자의 모습이 안개처럼 사르륵 흩어지더라는 게야. 정조께서는 그 자리에서 화들짝 놀라 깨어나셨답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는데,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게 좀처럼 가라앉질 않더라는 거예요.

    '꿈이었구나... 한낱 꿈이었구나...'

    그렇게 자기를 다독여 보셨지만, 그 꿈이 어찌나 또렷했던지 도무지 잊혀지지 않더라는 게야. 더구나 사도세자께서 가리키시던 그 산의 모습. 꽃봉오리 같던 그 형국. 임금께서는 새벽이 되도록 그 광경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아 한숨도 더 못 주무셨답니다.

    이튿날 아침, 임금께서는 가까이 모시는 신하를 조용히 불러 이르셨답니다.

    "내 어젯밤 기이한 꿈을 꾸었다. 선친께서 한 자리를 가리키시는데, 그 산 모양이 꽃봉오리 같더라.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이었네. 그런 자리가 실제로 있는지 알아보거라."

    신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러갔답니다. 그러나 그 한 마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땐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지요.

    여러분, 임금이 한밤에 꾼 꿈이 그저 꿈에 머무르지 않고 이렇게 한 도시의 운명을 흔드는 일이 어디 흔하겠습니까. 자, 이 다음 이야기가 진짜 기막힌 대목입니다.

    ※ 3: 화산을 찾아낸 신하

    며칠이 지났답니다. 임금의 명을 받고 나섰던 그 신하가 다시 어전에 들어와 엎드렸어요. 그런데 보세요, 그 신하의 얼굴빛이 어찌나 묘하던지요. 놀란 빛도 있고, 두려운 빛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깨달은 빛이 어렸더라는 게야.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하께서 말씀하신 그 산세에 꼭 들어맞는 자리를 찾았사옵니다."

    정조께서 그 한 마디에 가슴이 또 한 번 쿵, 하고 내려앉으셨답니다.

    "어디인가."

    "수원도호부 화산(花山)이라 하옵니다. 글자 그대로 꽃 화(花)에 뫼 산(山)이라, 이름조차 꽃 산이옵니다. 산세가 굽이굽이 이어져 흡사 활짝 핀 꽃봉오리 같다 하여 예부터 그리 불렸다 하오며, 풍수를 보는 자들이 모두 입을 모아 천하의 명당이라 일컫는 곳이옵니다."

    여러분, 그 말씀을 들으시던 임금의 표정이 어땠겠습니까. 한참을 말없이 앉아 계시다가, 굵은 눈물이 또르르 흐르셨답니다.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들도 그 모습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는 게야.

    '아바마마... 정녕 아바마마께서 그 자리를 일러주신 것이오니까. 살아생전 한 번도 그 좋은 자리에 머무시지 못한 그 한을, 이제 와서 이 못난 자식에게 풀어 달라 청하시는 것이오니까...'

    그러나 임금이라는 자리가 어디 마음대로 모든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자리이겠어요. 묘소를 옮긴다는 것이, 그것도 왕실의 묘소를 옮긴다는 것이 보통 큰일입니까. 더구나 그 화산이라는 자리에는 본디 수원 고을의 관아가 있고 백성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답니다. 거기를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게야.

    조정에서는 당연히 반대가 빗발쳤지요. 가장 거센 목소리가 무엇이었는고 하니, 본디 경국대전이라는 우리 조선의 큰 법전에 이런 조항이 있었답니다. 왕릉은 한양 도성 사대문에서 팔십 리 안에 두어야 한다, 이렇게 정해져 있었던 게야. 그런데 수원 화산은 한양에서 팔십팔 리, 그러니까 팔 리가 더 멀었더라는 거지요.

    "전하, 법도에 어긋나옵니다. 도성에서 팔십 리를 넘는 자리에 어찌 능침을 모시겠나이까."

    그 말씀에 정조 임금께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계시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여셨답니다. 그런데 임금께서 하신 그 말씀이 참 기막힌 한 마디였어요.

    "그러한가. 그렇다면 오늘부터 수원을 팔십 리라 명하노라."

    여러분, 이게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거리를 줄일 수가 없으니, 부르는 이름을 그냥 팔십 리라 정해버리겠다는 게야. 임금의 이 한 마디에 신하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지요.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절을 올리며 임금의 효심에 감복했고, 어떤 이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을 게야.

    그러나 정조께는 다른 길이 없으셨답니다. 평생 가슴에 묻어둔 아버지에 대한 한, 그 한이 마침내 꿈자리를 통해 풀려나오기 시작한 게 아니었겠습니까. 그 한 마디 뒤로 임금께서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이러셨다 합니다.

    '아바마마, 이 자식이 끝내 아바마마를 좋은 자리에 모셔드리겠나이다. 평생 한 번도 따스한 자리에 머무시지 못한 그 한, 이제는 풀어드리겠나이다.'

    자, 이렇게 해서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는, 우리가 흔히 천장(遷葬)이라 부르는 그 큰일이 시작되었답니다. 그것도 한 임금이 꾼 한밤의 꿈으로부터 비롯된 일이라니, 참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 4: 화성 축조의 단초

    정조 십삼 년, 시월이었답니다. 마침내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소가 수원 화산으로 옮겨졌어요. 그 자리에 새 능을 모시고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이라 지으셨답니다. '아버님의 은혜를 융성하게 보답한다'는 깊은 뜻이 담긴 이름이었지요.

    천장하던 그날의 광경을 잠깐 들려드릴게요. 임금께서 친히 행차하셨답니다. 양주에서 수원까지, 새 길을 닦아가며 행차하시는데, 그 길이 어찌나 멀고 험하던지요. 그러나 임금께서는 한 번도 가마를 멈추지 않으셨답니다.

    마침내 화산 자락에 다다르셨을 때, 정조께서는 가마에서 내려 맨발로 그 흙길을 걸어 올라가셨다는 게야. 신하들이 만류해도 듣지 않으셨다지요.

    "이 흙은 아바마마께서 누우실 자리이거늘, 어찌 신을 신은 채로 밟으리오."

    그 한 마디에 따라간 신하들이 다 함께 신을 벗었답니다. 임금이 맨발이신데 누가 감히 신을 신고 따르겠어요. 그 광경을 본 백성들도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고 전해집니다.

    정조께서 새 봉분 앞에 엎드려 한참을 흐느끼셨답니다.

    "아바마마, 이제야 좋은 자리에 누우셨나이다. 이제야 이 자식이 한 가지 효를 행하였나이다. 부디... 부디 평안하소서."

    그날 밤이었어요. 임금께서 행궁에 머무르셨는데, 또 한 번 꿈자리에 사도세자가 나타나시더라는 게야. 그런데 이번엔 표정이 달랐답니다. 첫 번째 꿈에서 보였던 그 깊은 그늘 대신, 이번에는 환하게 웃고 계셨다는 거예요.

    "산아... 잘 했다. 잘 했다."

    세자께서 그 한 마디만을 거듭하시며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 정조께서는 그 꿈에서 깨어나신 뒤 한참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셨답니다. 그러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으시며 혼잣말처럼 이러셨다 합니다.

    '아바마마께서 이제야 평안을 얻으셨구나.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바마마께서 누우신 이 자리, 이 일대를 정녕 좋은 땅으로 만들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 두 번째 꿈이 바로 수원 화성 축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답니다. 정조께서는 단순히 묘소만 옮기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그 일대를 통째로 새 도시로 만들기로 결심하셨던 게야.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본디 수원 고을 백성들은 묘소를 옮기느라 자기네 살던 자리에서 쫓겨나야 할 처지였답니다. 보통 임금이 묘소 자리를 정하면 그 자리에 살던 백성들은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쫓겨나는 게 다반사였지요.

    그런데 정조께서는 달랐어요. 백성들에게 직접 이르시기를:

    "이 고을은 내 아버님께서 누우실 자리요, 너희는 이 고을의 백성이라. 내 너희를 한 식구처럼 여기리니,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고 산업을 풍부하게 하여, 너희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리라."

    이 한 마디 약속이 빈말이 아니었답니다. 임금께서는 팔달산 아래에 새 도시를 지으시고, 거기로 옮겨가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빠짐없이 보상을 해주셨어요. 농사지을 땅을 나누어 주시고, 장사할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저수지까지 만들어 흉년에도 끄떡없게 하셨답니다.

    여러분, 한 임금이 꿈자리에서 만난 아버지의 한 마디가 결국 한 도시 전체를 일으키고, 수많은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게... 참, 이 대목을 풀 때마다 저는 가슴이 묘하게 따뜻해집니다. 그런데 진짜 기막힌 일은 아직 더 남아 있답니다. 정조의 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거든요.

    ※ 5: 화성 축조와 거듭되는 꿈

    자, 이제 본격적으로 화성 축조 이야기로 넘어가 봅시다. 정조 십팔 년, 갑인년(甲寅年) 정월이었답니다. 임금께서 마침내 수원에 새 성을 쌓으라 명을 내리셨어요. 화성(華城). 글자 그대로 빛나는 성, 꽃다운 성이라는 뜻이지요.

    이 성을 짓는 데 누가 큰 공을 세웠는고 하니, 여러분이 익히 들어 아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셨습니다. 정약용 선생께서 거중기라는 기특한 도구를 만들어내신 게 이때의 일이지요. 무거운 돌을 도르래의 원리로 가뿐히 들어 올리는 그 거중기 덕분에 공사 기간이 훨씬 줄어들었답니다.

    그런데 보세요, 임금께서 이 화성 공사를 지시하시면서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을 하셨어요. 무엇인고 하니, 공사에 동원되는 백성들에게 일한 만큼 품삯을 주라 명하신 거지요.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 하실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엔 정말 파격이었답니다. 본디 큰 공사라 하면 백성들을 부역으로 끌어다가 거저 부려먹는 게 당연한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정조께서는 이러셨답니다.

    "내 아버님 곁에 짓는 성에 어찌 백성의 한숨이 깃들게 하리오. 일한 자에게는 마땅한 삯을 주고, 다친 자에게는 약값을 주며, 반나절만 일한 자에게도 그만큼의 값을 치르라."

    여러분, 이 말씀이 어떤 무게로 다가오십니까. 한 임금이 아버지를 향한 정성으로 도시를 짓되, 그 도시가 백성을 울리지 않고 오히려 먹여 살리는 자리가 되도록 하신 게야. 그러니 백성들이 어찌 자발적으로 몰려들지 않았겠어요. 부역을 피해 도망 다니던 사람들까지 제 발로 찾아와 일을 거들었다지요.

    그렇게 화성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가을밤이었답니다. 임금께서 또 한 번 그 꿈을 꾸셨어요. 이번엔 이전과 또 달랐답니다. 사도세자께서 이번엔 새로 짓는 화성 성벽 위에 서 계셨다는 게야. 노을빛에 물든 성벽 위에서, 환한 얼굴로 임금을 바라보고 계셨답니다.

    "산아, 이 성이 참 좋구나. 백성을 살리는 성이로구나."

    정조께서 그 모습을 우러러보시며 무릎을 꿇으시는데, 사도세자께서 부드럽게 손을 내미셨답니다.

    "산아.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이 아비는 이미 평안하다. 너의 정성이면 충분하다. 너 또한 몸을 돌보거라."

    그 말씀에 정조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깨어나셨답니다. 새벽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데, 베갯잇이 흥건히 젖어 있더라는 거예요.

    다음 날 아침, 임금께서는 가까운 신하들에게 그 꿈 이야기를 또 한 번 들려주셨답니다. 보세요, 보통 사람 같으면 꿈 얘기를 부끄러워서 감추기 마련이건만, 정조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어요. 신하들 앞에 당당히 풀어놓으셨던 게야. 더구나 사관(史官)들에게 명하시기를:

    "내 꾼 꿈을 그대로 적어 두라. 후세 사람들이 이 일을 알 수 있도록 하라."

    그래서 그 꿈 이야기가 정조실록에, 또 연려실기술 같은 사적(史籍)에 또렷이 남게 된 거랍니다. 한 임금의 꿈이 그저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국가의 공식 기록이 된 셈이지요.

    그런데 임금이 자기 꿈을 이렇게 신하들에게 두루 알리고 기록까지 남기게 하신 데는 또 한 가지 깊은 뜻이 있었답니다. 그게 무엇이었느냐. 신하들 가운데 일부가 화성 공사를 두고 자꾸 트집을 잡았더라는 게야.

    "이렇게 큰 공사가 어찌 필요하옵니까. 나라 살림이 어렵사온데 멈추소서."

    이런 상소가 끊이지 않았던 게지요. 그때마다 정조께서는 꿈 이야기를 꺼내셨답니다.

    "선친께서 친히 그 자리를 일러주셨다. 이는 사사로운 효심이 아니요, 하늘이 짚어주신 일이라."

    여러분, 이 대목을 어떻게 보시겠어요. 그저 효심의 표현일까요, 아니면 신하들을 설득하기 위한 정치적 명분이었을까요. 그도 아니면 정녕 사도세자의 영혼이 아드님께 닿은 것일까요. 참, 이 대목에서 저는 늘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게 됩니다.

    ※ 6: 정조의 죽음과 아버지 곁으로

    시간이 흘러 정조 이십 년, 병진년(丙辰年)이 되었답니다. 마침내 수원 화성이 완공되었어요. 공사를 시작한 지 두 해 반 만에 마쳤으니, 그 시절 여느 큰 공사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빠른 속도였답니다. 거중기와 같은 새로운 도구, 그리고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어우러진 결과였지요.

    성이 완성된 그날, 정조께서는 친히 화성에 행차하셨답니다. 새로 지은 성벽 위에 오르시어 사방을 둘러보시는데, 한참을 말없이 서 계셨다는 게야. 그 모습을 곁에서 모시던 신하가 훗날 이런 글로 남겨 놓았답니다.

    "전하께서 성벽 위에 서시어 남쪽을 한참 바라보시는데, 그 눈에 깊은 그리움과 또 한 가닥의 평안이 함께 깃드는 듯하더라."

    남쪽이라 하면 어디겠어요. 아버지 사도세자께서 누우신 현륭원이 있는 그 자리지요. 임금께서 화성 성벽 위에서 아버지의 묘소를 바라보고 계셨던 게야. 가만히 혼잣말을 하시는데:

    '아바마마, 이 자식이 마침내 약속을 지켰나이다. 아바마마께서 일러주신 그 자리에 묘소를 모시고, 그 곁에 이렇듯 빛나는 성을 세웠나이다. 이제 아바마마께서는 외로이 누우셔도 외롭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그 후로 정조께서는 매년 정월이면 어김없이 현륭원에 행차하셨답니다. 또 어머님이신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회갑 잔치를 화성에서 열기까지 하셨지요. 이른바 을묘원행이라 부르는 그 행차인데, 조선왕조 통틀어 가장 장엄했던 행차로 꼽힌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의 운명이라는 게 참 무섭지요. 그렇게 평생을 아버지에 대한 효심으로 사신 임금께서, 어느 날 갑작스레 자리에 누우셨답니다. 정조 이십사 년, 경신년(庚申年) 유월이었어요. 그때 임금의 나이가 마흔아홉. 지금 같으면 한창때이건만, 그 시절엔 그게 끝이었던 게야.

    병환이 깊어가는 동안, 임금께서는 또 한 번 그 꿈을 꾸셨답니다. 마지막 꿈이지요. 사도세자께서 이번엔 환한 들판에 서 계셨더라는 거예요. 그 들판 너머로 꽃이 만발해 있고, 어딘가에서 청아한 새소리가 들려오는데...

    "산아... 이제 이리로 오너라."

    세자께서 두 팔을 활짝 벌리시며 부르셨답니다. 정조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는 순간 모든 것이 또렷해지더라는 게야. 아, 이제 갈 때가 되었구나. 평생 그리워하던 아버지께로 마침내 돌아가는 때가 되었구나.

    꿈에서 깨어나신 임금께서는 가까이 있는 신하를 부르셨답니다.

    "내가 가거든, 화성 가까이에, 아바마마 곁에 묻어다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청이니라."

    그 말씀이 임금의 유언이 되었답니다. 며칠 뒤, 정조 임금께서 마침내 눈을 감으셨어요. 그 짧은 마흔아홉 평생을 오로지 한 가지,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는 일에 바치신 분이 그렇게 가셨던 게야.

    장례를 치르고 임금의 능을 어디에 모실 것인가 하는 의논이 일어났답니다. 임금의 유언이 분명하니 다들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지요. 그래서 정조 임금의 능, 우리가 흔히 건릉(健陵)이라 부르는 그 자리가 마련된 게 어디였는고 하니, 바로 아버지 사도세자께서 누우신 그 융릉, 본디 이름 현륭원의 바로 곁이었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열한 살에 아버지를 잃고, 평생을 그 한을 가슴에 품고 살다가, 마침내 아버지가 일러주신 자리에 아버지를 모시고, 그 곁에 빛나는 성을 짓고, 그러고도 모자라 자기 자신마저 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청한 임금이라... 부자의 정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깊을 수 있는 것이로구나, 싶지요.

    지금도 경기도 화성 땅에 가시면 그 두 능이 나란히 누워 있답니다. 융릉과 건릉, 합쳐서 융건릉이라 부르는 그 자리지요. 살아서는 함께 하지 못한 부자가 죽어서 마침내 한자리에 누워 계시는 거예요.

    ※ 7: 꿈인가, 효심인가, 그 진실은

    자,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지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이야기를 풀어드리고 나면, 늘 한 가지 의문을 곱씹게 된답니다. 그 의문을 여러분과도 한번 나눠보고 싶어요.

    정조 대왕의 그 꿈, 정녕 무엇이었을까요.

    자, 한번 차근차근 풀어볼까요. 첫 번째 가능성은 무엇이었느냐. 그저 깊은 효심에서 비롯된 마음의 일이었다는 해석이지요. 사람이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면 꿈에 그게 나타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정조께서 평생을 아버지를 그리며 사셨으니, 어느 날 그 그리움이 꿈으로 흘러나와 산자락 하나를 가리키시는 모습으로 펼쳐졌다... 이런 해석이 가능하지요.

    두 번째 가능성은요? 정치적 명분이었다는 해석입니다. 보세요, 그 시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노론 세력이 여전히 조정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답니다. 임금께서 그저 "내가 아버지의 묘를 옮기고 싶소" 하고 말씀하시면, 그건 사사로운 효심으로 치부되어 반대에 부딪히기 십상이었지요. 그러나 "선친께서 친히 꿈에 나타나 자리를 일러주셨다" 하시면, 그건 하늘이 정한 뜻이라는 더 큰 명분이 되는 게야. 그래서 일부러 꿈 이야기를 만들어내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가능성은... 정녕 사도세자의 영혼이 아드님께 닿은 것이라는 해석이지요. 우리 옛 어른들은 죽은 이의 한이 풀리지 않으면 그 혼이 자손의 꿈에 나타난다고 믿어오셨답니다. 사도세자께서 뒤주에 갇혀 그 무서운 죽음을 맞으셨으니, 그 한이 어디 보통이겠어요. 살아생전 평안한 자리 하나 얻지 못한 그 한이, 마침내 아드님의 꿈자리를 통해 풀려나오게 된 것이라고 보는 거지요.

    여러분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어느 해석이 맞는다 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 세 가지가 다 함께 얽혀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답니다. 그게 무엇이냐. 정조 임금께서 아버지를 그리워하신 그 마음, 그 효심만큼은 진실이었다는 거지요. 꿈이 진짜였든, 명분이었든, 환영이었든... 그 임금이 평생을 두고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려 애쓰신 그 정성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효심이 단지 한 개인의 효도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정조 임금의 그 깊은 그리움이 결국 무엇을 만들어냈습니까. 수원 화성이라는 위대한 도시. 백성들에게 일한 만큼 품삯을 주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한 새로운 공사 방식. 부역으로 끌려가던 백성들이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은 그 자리. 농사지을 땅과 장사할 자리를 받고 평안히 살아갈 수 있게 된 수많은 가구들...

    한 임금의 사사로운 효심이 결국 수많은 백성을 살리는 일로 이어진 셈이지요. 참, 우리 옛 어른들 말씀에 효(孝)는 만행지본(萬行之本)이라 하셨거든요. 효가 모든 행실의 근본이라는 뜻이지요. 정조 대왕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말씀이 어찌 그리 옳은지...

    지금도 수원 화성에 가보시면 말이지요, 그 견고한 성벽과 우뚝 솟은 장안문, 화홍문, 그리고 행궁의 그 의젓한 자태가 그대로 남아 있답니다. 아버지를 그리던 한 임금의 마음이 돌이 되고 흙이 되어 우뚝 서 있는 게야. 그리고 그 남쪽으로 조금만 가시면 융건릉이 있어요. 사도세자와 정조, 부자가 마침내 나란히 누워 있는 그 자리지요.

    여러분, 만약 한가한 봄날 한 번 다녀오실 기회가 있으시거든, 그 융건릉 앞에 잠깐 서서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어쩌면 어디선가 사도세자께서 정조를 부르시는 그 한 마디가 들려올지도 모를 일이거든요.

    "산아... 잘 했다. 잘 했다."

    유튜브 엔딩멘트 (291자, 질문형)

    여러분, 오늘 이 이야기를 들으시며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요. 정조의 그 꿈, 정녕 사도세자의 혼이 닿은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평생을 두고 아버지를 그리던 그 깊은 효심이 빚어낸 마음의 풍경이었을까요. 그도 아니면 신하들을 설득하기 위한 임금의 슬기로운 명분이었을까요. 해석은 듣는 이마다 다 다르겠지요. 그러나 그 임금이 아버지를 그리던 마음만큼은 정녕 진실이었음을, 우리 모두 한 가지 마음으로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야기 좋게 들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리며, 다음 역사 엑스 파일에서 또 뵙겠습니다.

    썸네일 프롬프트 (영어, 16:9, 실사, no text)

    A solitary figure of a Joseon-era Korean king in dark royal robes standing alone atop an ancient stone fortress wall at deep dusk, gazing southward into a thick mysterious mist where the faint silhouette of a flower-shaped mountain rises in the distance, a single ghostly translucent figure of a royal prince barely visible within the swirling fog as if appearing in a dream, a half-moon glowing softly above traditional Korean curved tile rooftops, autumn maple leaves drifting silently through cold blue air, deep navy and indigo color palette accented with faint warm amber lantern glow on the wall, hyper photorealistic cinematic lighting, atmospheric chiaroscuro with rich shadows, ultra detailed stone texture and silk fabric, melancholic and sacred otherworldly mood, 16:9 aspect ratio, no text, no logos, no faces shown clearly, no Western elements